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5·18 민주화운동/전개 (문단 편집) === 광주에서 보인 움직임 === [youtube(ptRh4H_q7Cc)] >"제가 [[전남대학교]] 총학생회장 박관현이올시다. 이 우레와 같은 박수와 여러분의 함성이 전 국토와 민족에게 다 들릴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큰 목소리로 외쳐봅시다. '''우리가 민족민주화 횃불대행진을 하는 것은 이 나라 [[민주주의]]의 꽃을 피우고, 이 횃불과 같은 열기를 우리 가슴속에 간직하면서 우리 민족의 함성을 수습하여 남북통일을 이룩하자는 뜻이며, 꺼지지 않는 횃불처럼 우리 민족의 열정을 온 누리에 밝히자는 뜻입니다.''' 이런 뜻에서 우리 광주시민, 아니, 전남도민, 아니, 우리 민족 모두가 이 횃불을 온 누리에 밝히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." >---- >1980년 5월 16일 민족민주화대성회에서 박관현의 연설 [[서울의 봄]]은 광주에서도 민주화 열기를 불러일으켰다. 전국 대학들의 흐름에 따라 광주 일원의 대학들에서는 학생자치조직이 재건되었으며, [[운동권]] 조직도 보강을 거쳤다. 그 중심에 있던 것이 [[전남대학교]]와 [[조선대학교]]였다. 먼저 전남대학교는 전남 운동권의 핵심으로서 반유신 활동을 하다가 제적 및 투옥된 학생과 교수가 많았다. 이들이 돌아오면서 다시금 학교 내 민주화운동이 활발해졌고 1980년 3월 직선제를 통해 총학생회가 부활하였다. 전남대학교 [[법대]] 3학년생인 [[박관현]]이 총학생회장으로 선출되었고, 「대학의 소리」라는 홍보물도 만들어졌다. 조선대학교에서는 복적생과 재학생이 학교의 고질적 문제였던 사학재단 비리를 척결하고자 학원자율화를 위한 운동을 재개했다. 학교가 이를 탄압하자 학생들은 '조선대 민주화투쟁위원회'를 결성하여 대항하였다. 이외에도 [[광주교육대학교]], [[호남대학교|성인경상전문대학교]], [[동강대학교|동신전문대학교]], [[조선이공대학교|조선대학교병설공업전문대학교]] 등에서도 총학생회 부활을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. 이를 통해 학생들은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요구하기 시작했다. 이런 학생들의 활동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건 아니었다. 이들의 역량은 그 이전부터 이어져 오고 있었던 반유신운동과 사회운동, 그리고 문화예술운동 조직들과 밀접하게 이어져 있었다. 대표적인 조직이 [[http://www.rcef.or.kr/sub08/sub02.php?seq=122&page=1&index=&searchword=&code=1&boardname=board_col&mode=view&PHPSESSID=3ea5447456b573f0b95ef53d4b6f17a2|녹두서점]][* 사회과학서적을 전문으로 취급하던 서점으로 현재의 광주시 [[동구(광주)|동구]] 장동 로터리에 있었다. 주인은 김상윤과 [[http://www.sisapress.com/journal/article/110724|정현애]]로 둘 다 광주지역의 사회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었다. 녹두서점은 광주 일원 운동권의 중요한 아지트로서 운동권 학생들의 주요한 모임 장소였으며, 5.18 당시에도 학생들이 모여들어 논의를 하곤 했다.]으로 각 대학의 운동권들을 연결해주는 접선책 역할을 해주었다. 또 [[김남주(시인)|김남주]], [[윤한봉]] 등이 운영하던 '현대문화연구소'는 운동권의 중요한 [[싱크탱크]] 중 하나였다. [[YMCA]], [[YWCA]], [[가톨릭농민회]] 등의 [[기독교]] 단체들은 교인들을 중심으로 사회운동에 참여하며 학생들을 지원했고, 70년대에 조직된 문화예술단체들과 청년단체들도 힘을 보태었다. [[야학]]도 중요한 사회운동으로서 학생들이 노동자를 가르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는데, 여러 야학 중에서도 [[http://www.siminsori.com/news/articleView.html?idxno=13261|들불야학]][* 1978년 광주 [[광천동]]에서 조직된 야학으로 전남대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. 이 야학에 참여한 학생들은 강사로 활동하면서 광천동 부근의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던 나이 어린 노동자들을 가르쳤다. 나중에 5.18이 터지자 강사 대부분이 항쟁에 참여했으며, [[투사회보]]를 제작하거나 시민군에 참여하였다. 들불야학 출신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나중에 [[시민군]] 대변인을 역임했던 [[윤상원(1950)|윤상원]]이다. 그를 포함한 들불야학 7명의 사람들(윤상원, 박기순, 박용준, 박관현, 신영일, 박효선, 김영철)은 [[http://edu.518.org/upload/edu/html/21_pic40.htm|들불야학 7열사]]로 불려지고 있다.]이 가장 유명했다. 이렇게 광주 내에 있었던 다양한 사회운동 조직들은 학생운동과의 연계를 통해서 시민들과의 접촉을 넓혀갔고, 이는 향후 5.18에 있어서 적잖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